• 최종편집 2024-04-0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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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혁신의 야마하, 색소폰 클리닉
    그러니까, 뭐든 앞서나갈 수 있는 비결이 궁금했다. 업계 최초로 색소폰 클리닉을 개설하고, 혁신적인 방식으로 고객과 소통하는 비결이. 음악계의 트렌드에도 민감해서 디지털 악기 분야를 선점한 기술력이. 야마하뮤직코리아(이하 야마하)의 슬로건인 ‘메이크 웨이브즈(Make Waves)’의 뜻 그대로, 음악을 통해 새로운 물결을 만들겠다는 목표를 성실하게 이행 중인 이 브랜드의 비결이 알고 싶었다. 그 해답의 실마리를 최근 경기도 용인에서 열린 ‘야마하 색소폰 클리닉’에서 찾을 수 있었다. ▶기사 전문은 월간색소폰 3월호에서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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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04
  • 색소폰계의 흐름이 변한다, 아마추어 연주 트렌드 심층 분석
    아마추어 색소폰 연주인들의 연주 트렌드가 조금씩 변하고 있다. 솔로에서 앙상블로 연주 형태가 확장 됐고, 비주류였던 클래식이나 영화 음악의 인기가 높아졌다. 색소폰에서는 아마추어이지만, 작곡이나 노래 등 타 분야에서 활약하는 프로 뮤지션들의 유입도 돋보인다. 2024년 새해부터 그 변화가 더욱 두드러질 아마추어 연주 트렌드를 함께 살펴보자. 2000년대 후반 중년 남성을 중심으로 시작됐던 ‘색소폰 붐 (boom·어떤 사회 현상의 갑작스러운 유행)’은 이미 오래전부 터 다양한 연령층과 성별로 확대됐다. 여성 연주자는 물론 젊은 연주자들이 속속 등장했고, 제4회 엘프 색소폰 콘테스트에서 야마하상을 수상한 안세린양처럼 일찍이 색소폰에 입문한 사례 도 찾아볼 수 있다. <월간색소폰>에도 소개된 바 있는 김포 대 명초등학교의 색소폰 앙상블과 배문중학교의 색소폰 오케스트 라도 색소폰 인구 다양화의 대표적인 사례다. ▶기사 전문은 월간색소폰 2월호에서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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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2-29
  • 월간색소폰 필진 좌담회
    <월간색소폰>이 2024년 새해를 앞두고 악보 필진 좌담회를 열었다. 이번 좌담회는 독자들에게 더욱 양질의 콘텐츠를 제공하기 위해 여러 의견을 수렴할 목적으로 마련됐다. <월간색소폰>은 앞으로 필진 좌담회를 시작으로, 독자 간담회 등 다양한 소통의 장을 마련할 계획이다. 글ㅣ 박은주 기자 <월간색소폰> 필진 좌담회가 지난 12월 12일 서울 송파의 한 식당에서 열렸다. 이날 좌담회에는 악보 필진인 ▲이정식 연주자(쉽게 배우는 재즈 색소폰) ▲이수연 연주자(아름다운 선율의 클래식 색소폰), 이번 1월호부터 가요 악보를 담당하게 된 ▲김성길 연주자(김성길의 감성 K-POP )가 참석했다. 아울러 악보 대신 ‘스폰툰’과 ‘색소폰 런앤톡’을 맡게 된 ▲임민택 연주자, 그리고 월간색소폰 유튜브 방송을 함께 하고 있는 ▲김슬기 연주자까지 자리했다. 이렇게 총 5명의 필진이 모인 가운데 <월간색소폰>의 현재 상황을 진단하고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이야기 하는 시간을 가졌다. ▶기사 전문은 월간색소폰 1월호에서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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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1-02
  • 꿈꾸는 ‘거위’들의 첫 비행, 브랜든 색소폰 오케스트라 창단 연주회
    클래식 색소포니스트 브랜든 최가 자신의 이름을 내걸고 국내 최초의 클래식 색소폰 오케스트라를 창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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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2-01
  • 푸른빛으로 타오르는 재즈…18세 청춘들의 '블루 자이언트(Blus Giant)'
    블루 자이언트 특별 시사회에서 공연 중인 색소포니스트 김성주씨 일본에 이어 미국 관객까지 사로잡은 재즈 애니메이션 ‘블루 자이언트(Blue Giant)’가 10월 18일 국내 개봉했다. 동명의 인기 만화를 원작으로 한 만큼 국내 재즈 마니아들의 뜨거운 관심이 계속되고 있다. 개봉 전부터 주요 재즈 클럽을 중심으로 각종 이벤트가 열렸고, SNS에서도 관련 게시물이 쏟아지는 중이다. <월간색소폰>은 그중에서도 지난 10월 9일 ‘천년동안도 강남’에서 열린 특별 시사회에 참석해 ‘블루 자이언트의 재즈’를 미리 만나봤다. 사방으로 푸른 빛이 튄다. 한계를 넘어 뜨겁게 달아오른 온도는 붉은빛을 내뿜다 못해 서슬 퍼런빛으로 밤하늘을 수놓는다. 그렇게 반짝이는 별을 가리키는 말인 ‘블루 자이언트’. 엄청난 무대를 펼친 재즈 플레이어를 일컫는 말이기도 하다. 혼신의 힘을 쏟아부은 연주는 관객을 매료시키고, 공연장을 달군 열기는 강렬한 스파크처럼 번쩍인다. 그 압도적인 기세가 영화 블루 자이언트의 매순간에 깃들어있다. 블루 자이언트 그 자체인 주인공 ‘다이’도, 열정만큼은 다이 못지않은 동료들도, 거장의 손길이 담긴 음악도, 성장 만화의 정석인 스토리도, 모두 숨이 막힐 듯한 맹렬함으로 관객을 사로잡는다. -중략- 물론 목표가 이뤄지기까지의 과정이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언제나 찬사만 받던 유키노리가 한 사건을 계기로 슬럼프에 빠졌다가 이를 극복하거나, 쏘 블루의 무대를 앞두고 큰 위기가 닥치는 등 여러 고비가 등장한다. 여느 성장 드라마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클리셰다. 그러나 그 클리셰가 진부하지 않게 느껴지는 건 영화 전반에 깔려 있는 주인공들의 진심 어린 열정 때문이 아닐까. 때로는 세련된 말보다 촌스럽고 투박한 고백이 마음을 울리 듯, 목표를 향해 전속력으로 달려가는 세 사람의 의지는 뭉근한 감동을 준다. 아무리 진부해도, 결말이 예상돼도, 가난한 청년의 자수성가 스토리를 응원하게 되는 것처럼, 어느샌가 이들의 성공을 진심으로 바라게 된다. 영화의 표현을 빌리자면 “내장까지 까보이는 연주”로 온 마음을 다해 열정을 토해내는데, 그 진심에 반하지 않을 수 있을까. ▶기사 전문은 월간색소폰 11월호에서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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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01
  • 음악대학에서 꽃피우는 ‘만학의 기쁨’…강릉영동대학교 실용음악예술과
    강릉영동대학교 실용음악예술과 색소폰 전공 학생들이 합주 연습을 하고 있다. 강릉영동대학교 실용음악예술과를 방문한 9월 13일. 강의실의 문을 열고 들어서자 옹기종기 모여 있는 학생들의 모습이 보였다. 오전 10시가 되지 않은 이른 시간인데도 연습에 열을 올리고 있던 이들은 실용음악예술과의 색소폰 전공생들. 그중에서도 인생의 중반기, 혹은 황혼기에 접어들어 음악의 열정을 불태우고 있는 만학도들이다. 이들의 지도 교수는 강릉을 거점으로 활동 중인 색소포니스트 장용국씨. 이날 장씨의 안내에 따라 색소폰 전공 수업과 합주 연습을 차례로 참관했다. 이날 처음으로 만나 본 학생들은 졸업을 앞두고 있는 색소폰 전공생 ▲이정연 ▲황미자 ▲장종석씨였다. 예비 졸업생의 연주를 듣고 한 명 한 명 세심하게 피드백을 주는 실습수업이기 때문에 대게 소규모의 정원으로 진행된다. 한명씩 무대에 올라 연주를 선보이면, 장씨가 보완할 점을 가르쳐주는 식이다. 장씨는 수업이 진행되는 내내 날카로운 시선으로 학생들의 연주를 분석했다. 구체적인 연습 방법부터 선곡에 대한 조언, 마이크의 위치를 제대로 선정하는 방법까지. 학생들의 연주를 듣는 동안 피드백 내용을 적는 장씨의 손은 쉴 틈이 없었다. 반대로 잘한 부분은 적극적으로 칭찬했다. 지난 수업 때에 비브라토가 좋아진 학생에게 연습량을 칭찬하는 등 세심한 모습이었다. 뒤이어 진행된 합주 수업. 기타, 피아노, 드럼, 보컬, 색소폰 등 각 파트의 학생들이 전부 무대로 나와 기량을 마음껏 뽐냈다. 작은 실수가 나올 때도 있었지만 서로 눈빛을 주고받으며 다시 호흡을 맞춰가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특히 피아노 전공생들과 기타 전공생들의 수준급 연주 덕분에 무사히 합주가 마무리될 수 있었다. 현재 강릉영동대학교는 실용음악예술과 외에도 다른 학과에서 만학도 입학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만학도로 학교생활을 시작하더라도 다른 학생들과 똑같은 커리큘럼을 밟는다. 학업과 일을 병행하는 경우가 많은 만학도의 특성상 학교생활에 무리는 없을까. 수업 참관이 마무리된 뒤 실용음악예술과 학과장인 이상규 교수를 만나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Mini Interview 실용음악예술과 학과장 이상규 교수 안녕하세요,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먼저 교수님에 대한 간단한 소개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강릉영동대학교 실용음악예술과 학과장 이상규입니다. 저는 서울대학교 음악대학에서 성악을 공부한 뒤, 이탈리아의 밀라노 국립음악원에서 성악과와 오페라과를 전공했습니다. 국립음악원이 이탈리아 전역에 있는데, 밀라노에서는 최초로 5년 과정을 1년 8개월 만에 조기졸업한 뒤 최고 연주자 과정까지 밟았습니다. 이후 유럽에서 활동하며 10편 이상의 오페라 작품에서 주역을 맡았는데요. 귀국 후 서울대학교와 경북대학교에서 성악을, 백석예술대학교에서 뮤지컬을 가르쳤습니다. 현재 강릉영동대학교에서 오페라, 성악, 뮤지컬 등 다양한 장르로 학생들과 만나고 있습니다. 학과에 대한 설명도 들을 수 있을까요? 만학도 분들이 많이 계신 것으로 알고 있어요. 맞아요. 젊은 시절 음악에 대한 꿈을 가지고 계시다가 피치 못할 사정으로 그 꿈을 접게 된 많은 분들이 강릉영동대 실용음악예술과를 찾아주고 계세요. 비수도권 지역이라서 인구가 많지 않은 편인데, 음악에 대한 열정을 가지고 계신 분들은 정말 많더라고요. 지역 자치센터나 학원, 동호회 등을 통해서 음악 활동을 하실 수도 있지만 좀 더 전문적으로 공부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가진 분들과 만나 뵙고 있죠. 만학의 열정과 기쁨은 남다를 것 같아요. 그분들을 지도하시는 건 어떠세요? 생업을 유지하면서 대학교에서 음악을 전공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만큼 음악을 진심으로 사랑하시는 거겠죠. 저는 그동안 20대 전공생들을 주로 가르쳐왔는데, 이렇게 음악을 순수한 마음으로 좋아하는 분들과 만나고, 제가 도움을 드릴 수 있어 감사한 마음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우리 현역 학생들뿐만 아니라 만학도 분들의 열정까지 계속 북돋아주기 위해 힘쓰고 있는 중입니다. 수업을 진행하면서 특별히 신경 쓰는 부분도 있나요? 아무래도 늦은 나이에 시작하신 전공 공부이기 때문에 어려운 부분이 많을 수 있어요. 그래서 저도 교수님들에게 항상 ‘맞춤형 수업’을 강조하거든요. 물론 많은 노력이 필요한 일이지만 학생 분들이 더욱 즐겁게 학업에 임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고, 또 기본기가 부족할 수 있어서 기초 수업에도 더욱 많이 시간을 할애하는 편입니다. 만학도 분들과 현역 학생들이 서로 북돋아주면서 좋은 분위기가 유지되고 있기 때문에 참 감사한 것 같아요. 실용예술음악과가 생긴지 3년이 채 되지 않았죠? 홍보에 대한 고민도 있으시겠어요. 아무래도 그게 아쉬운 부분이에요. 아직 많은 분들이 모르는 것 같아서 어떻게 하면 더 알릴 수 있을까 고민하고 있죠. 그래서 저희만의 공연 브랜드를 만들었는데요. 이름이 ‘빠따떼’예요. 어감이 좀 센 편이죠?(웃음) 이탈리아어로 감자라는 뜻인데요. 강원 영동 지역을 상징적으로 나타낼 수 있는 이름을 붙이고 싶었는데, 이 지역에 감자나 옥수수가 많이 난다는 얘기를 듣고 착안해냈죠. 이름이 너무 귀여운데요? 입에 착 붙는 것 같아요.(웃음) 정기적으로 연주회를 열고 있는 건가요? 맞아요. ‘빠따떼 더 리허설’과 정식 공연인 ‘빠따떼’로 나누어 진행하고 있는데요. 일단 저희만의 공연 브랜드를 만들었던 가장 큰 취지가 학생들이 무대를 더욱 즐길 수 있도록 무대 경험을 많이 쌓아주자는 거였어요. 그래서 ‘빠따떼 더 리허설’ 때는 관객 분들을 초대하지 않아요. 갑자기 무대에 서면 학생들이 압도될 수 있어서요. 그보다 여태까지 열심히 연습한 것을 마음껏 뽐내면서 ‘무대는 놀이터’라는 생각으로 즐길 수 있도록 하죠. 이후 학기 말에 ‘빠따떼’, 그러니까 정기 공연을 열어요. 지난 학기에 첫 연주회를 열었는데요. 학생들이 긴장감 있게 공연을 준비하더라고요. 열심히 하다 보니 실력도 향상되고, 기억에 남는다는 좋은 피드백도 많았고요. 그래서 졸업 시즌에는 ‘빠따떼 더 졸업’이라는 타이틀로 졸업 연주회를 열어보려 기획하고 있습니다. 현재 학과장으로 계시면서 가장 집중하는 부분이 있다면요? 각자 다양한 색깔을 가진 학생들이 한곳에 모여 학교생활을 하는 거잖아요. 그래서 학생들이 강릉영동대학교 실업음악예술과라는 하나의 타이틀 아래 마음이 모여질 수 있도록 가장 신경 쓰는 것 같아요. 그래야 합주 같은 걸 할 때도 더 좋은 호흡이 나온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래서 학생 상담에 많은 노력을 쏟고 있어요. 학생들이 조금이라도 더 즐거움을 느꼈으면 하거든요. 학과장으로 계시는 동안 꼭 이루고 싶은 목표 같은 것도 있을까요? 아무래도 학과가 생긴 지 얼마 안 됐기 때문에 널리 알리는 게 가장 큰 목표인 것 같아요. 그래서 많은 고민을 했는데, 음악 전공이다 보니 공연만큼 좋은 게 없더라고요. 그런 취지로 빠따떼도 만든 건데요. GNL이라는 저희 교수진 밴드도 만들었어요. 강릉의 약자인 GN에 라이프(Life)의 L을 따온 거예요.(웃음) 저희가 빠따떼 연주회 때 공연을 하기도 하지만, 강릉 시내의 라이브 공연장에서 공연도 하고, 강릉 mbc 라디오에도 홍보 차원에서 나가는 등 여러모로 학과 홍보를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한 말씀 해주신다면요? 현재 입시철이에요. 학과장으로서 학과가 부흥했으면 하는 마음이 가장 크기 때문에 많은 관심을 가져주시면 좋겠어요. 가슴 한 구석에 음악에 대한 열정을 가지고 계신 분들이라면 언제든지 강릉영동대학교 실용음악예술과의 문을 두드려 주시면 좋겠습니다. *강릉영동대학교 2024학년도 신입생 모집 일정
    • Special
    2023-10-04
  • [색소폰, 흩어진 기억을 찾아서] 장인표 연주자가 말하는 그때 그 시절
    한국 6,70년대에 색소폰 소리가 울려 퍼지던 그곳의 풍경은 어땠을까. 그 시절의 사람들은 어떻게 음악을 했고, 어떤 삶을 살았을까. 돌이켜보면 빛바랜 듯 서글픈 그 시절에 대한 감상은 그 시대 젊은이들의 열정이었고, 꿈이었고, 사랑이었기에 가슴 아픈 아름다움으로 남아있다. 전쟁과 해방을 겪으며 시대의 아픔을 노래하고 그로 인해 피어난 미8군에서의 한국 대중가요 전성기는 우리 음악의 뿌리이자 우리 음악의 정체성이기도 하다. 장인표 악단장은 1960년도에 미8군을 거쳐 ‘윤항기와 키브라더스’, 그룹 ‘돈키호테’ 등에서 색소폰을 연주했다. 이후 경찰 악대에 특채로 들어가면서 대통령상 수상, 단장 및 지휘자 역임, 국제대회 참가, 세션 활동 등 화려한 이력을 보유한 그에게 경찰악대에 들어가기 이전의 활동 시기에 대해 이야기 들어봤다. 한국에는 미8군이 주둔하고 있었고 미8군쇼는 한국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을 대상으로 하던 무대였다. 1953년 7월, 휴전과 함께 전국 각지에 주둔하는 캠프에 있는 클럽을 주 무대로 미군위문협회는 공연단을 보내 위문 공연을 펼쳤다. 마를린 먼로, 냇 킹 콜과 같은 스타들을 보내다가, 이후 비싼 몸값을 지불하는 게 어려워져 한국의 악단들을 무대에 세우기 시작했다. 이후 1958년 즈음 미8군 쇼단을 체계적으로 운영하기 위해 상공부 등록 허가제로 제도가 바뀌게 된다. 당시 쇼 공급회사의 허가 조건은 미8군쇼 등록 단원들로 구성된 쇼단이 다섯 개 이상이어야 했는데, 이로 인해 각자 활동하던 쇼단들이 인력을 합쳤고 그중 가장 먼저 움직인 곳이 화양이다. 화양은 미8군쇼 공급회사의 대표격으로 전성기 때는 5백여 명의 단원이 소속되어 있던 대행업체다. 화양은 당시 미8군 무대에서 〈베니김 쇼〉를 진행해 인기를 얻었는데, 이어 화양과 쌍벽을 이루는 유니버설 흥업을 비롯해 고려, 공영, 극동, 동일, 대영, 삼진, 아주 등 미8군쇼 공급 대행업체가 잇달아 생겨났다. “61년도에 미8군에서는 하우스 밴드라고 해서 문산, 포천, 부평, 군산, 평택 등 하우스 밴드가 5인조로 활동을 했습니다. 종로에 화양이라는 회사가 있어요. 거기 모여서 당신은 어디로 가라고 배정해주면 한 달마다 각지에 다니면서 공연을 했어요. 공연장 근처에서 하숙하고…. 그걸 몇 년씩 했죠. 희로애락도 있고요. 거기서는 음악이 두 가지 분류였어요. 백인이 좋아하는 컨트리 송, 흑인이 좋아하는 소울 음악. 그래서 폴카나 컨트리 송을 연주하면 백인들이 춤추면서 좋아했죠. 그런데 흑인들은 싫어했어요. 그래서 컨트리 쇼는 흑인 클럽에는 부킹이 잘 안돼요. 저는 흑인 클럽에서 소울 음악으로 몇 년 했어요. 패키지 쇼는 캄보밴드(소규모 밴드) 형식으로 해서 가수 한두 명 데리고 했죠. 그때는 키브라더스 윤항기 씨가 백인들한테는 최고의 인기를 얻었어요. 엘비스 프레슬리, 루이 암스트롱 같은 가수의 노래를 하면 똑같이 해요. 그러면 미군들은 “윤항기 베리 굿” 하면서 모두가 일어나 “치얼스(Cheers)!”했죠. 그분은 트럼본으로 칙칙폭폭 기차 소리를 내기도 했어요. 그런 기술을 부려서 굉장히 많은 인기를 가졌죠.” 1961년부터 야간 통행금지가 해제된 1982년까지의 통상적 통금 시간은 0시부터 4시까지였다. 통금 사이렌이 울리고 나면 밤 12시부터 통금이 풀리는 새벽 4시까지 문을 걸어 잠그고 영업을 했던 곳이 있었는데, 그곳이 바로 ‘고고클럽’이다. 클럽의 문이 열리면 많은 이들은 근처 해장국집으로 내달리며 열정을 식혔는데, 이러한 모습은 지금의 한국 밤 문화와도 많이 닮아있다. 밤이 끝나도록 아무도 빠져나갈 수 없는 그 공간은 그야말로 터질 듯한 젊음의 열기로 가득했다. 특히, 당시 최초의 고고클럽으로 개장한 ‘닐바나’는 술과 라이브 연주에 어우러져 무대에서 자유롭게 춤을 출 수 있었고 일급 그룹사운드들의 무대였으며, 장안의 내로라하는 멋쟁이 선남선녀들이 춤을 추던 댄스 공간이었다. “70년대 넘어서면서 카바레가 많아졌어요. 저는 윤항기 씨와 그룹사운드 쪽으로 해서 퇴계로에 닐바나 라는 클럽에서 공연을 했어요. 2층, 3층으로 나뉘어서 두 개의 클럽으로 돼있었는데, 공연을 한번 하면 새벽 4시까지 해요. 사람들로 바글바글했죠. 2층, 3층을 오가면서 윤항기 씨와 키브라더스로 활동을 했고 당시 데블스라는 그룹사운드도 같이 활동했었죠. 그때 즈음부터 그룹사운드들이 많이 생겨났고, 고고클럽이 유행하기 시작했어요. 그때 하던 사람들이 윤항기, 윤수일 등 다양한 그룹사운드와 가수들이 등장했어요. 조용필도 그중 하나였는데, 고고클럽에서 조용필이 노래를 하면 손님이고 아가씨들이고 짜릿한 감정으로 손뼉을 치고 그랬어요. 노래를 아주 잘했어요. 대성하겠구나 했는데, 갑자기 어떤 연유로 부산으로 갔죠. 당시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에〉가 부산서부터 무섭게 치고 올라오더라고요. 그렇게 노래를 잘하니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최고의 가수가 된 거죠.” “고고클럽에는 70년대 초에서 80년대 넘어가기 전까지는 국산 노래를 안 했어요. 외국의 팝 음악만 하고 국산 노래하면 과장된 말로 좀 저질이라고 했어요(웃음). 조용필〈돌아와요 부산항에〉, 윤수일의 〈사랑만은 않겠어요〉, 조경수 〈행복이란〉 등 그렇게 80년대 넘어가면서부터 그룹사운드가 자기 노래를 해서 나오기 시작한 거죠. 함중아 〈안개속에 두 그림자〉, 최헌 〈검은나비〉, 〈앵두〉, 〈오동잎〉 등 많이 했는데, 아직은 돌아갈 나이 아닌데 몇 년 전에 안 좋아져서 돌아갔어요. 좋은 친구가 먼저 가니까 아쉽지. 저는 당시 미8군에서 나와서 키보이스라는 그룹으로 활동했어요. 윤항기 외 5명이 영어로 된 음악을 번안해서 부르다가 〈바닷가의 추억〉, 〈해변으로 가요〉같은 곡들이 유명해졌죠. 그런 걸 했어요. 지금은 고인이 된 차중락 씨의 〈낙엽 따라 가버린 사랑〉이 엘비스 프레슬리 노래를 번역해 불러서 아주 히트를 쳤죠. 그분의 사촌 되는 분이 차도균 씨에요. 〈낙엽 따라 가버린 사랑〉을 오히려 차정남 씨보다 백배 이상은 더 불렀을 거예요. 차도균 베이스, 윤항기 드럼 그리고 김홍탁 씨가 기타를 쳤고 옥성빈 씨가 키보드를 연주했던 게 1기 키보이스였어요. 그러다 또 각자들 헤어져 나가는 거예요. 2인조로 했다가 7인조로도 했다가…. 그다음에 윤항기 씨는 키브라더스라는 새로운 팀으로 미국 팝송 번안만 했죠. 70년대에는 고고클럽 닐바나에서 윤항기 씨와 같이 활동했죠. 나이트클럽에서 쭉 그룹으로 활동하면서 제 나름대로 돈키호테라는 그룹을 만들었어요. 많을 때는 7명, 적을 때는 6명 그렇게 해서 고고클럽과 나이트클럽만 다녔어요. 저는 카바레에서는 사실 잘 안 했어요. 어쩌다가 해달라고 하면 하고 방송할 때 엑스트라로 좀 가고 그랬죠.” 스윙이나 스탠더드 팝, 컨트리 등을 연주했던 1950년대와 달리 60년대에는 비틀스의 등장이 세계적 열풍을 일으킨다. 팝 음악의 역사는 비틀스의 등장 전과 후로 나뉜다는 얘기가 나올 정도로 문화적 파급력이 상당했던 지라 그 열풍은 곧 한국에 상륙했고 젊은이들은 그들의 음악, 문화, 복장 모든 것에 열광했다. “당시에 윤복희 씨가 미국에서 들어와서 미니스커트를 입었었는데, 그것도 경찰들이 몇 센티 위로는 안 된다고 검거하고 그랬어요. 또 비틀스가 유행을 했잖아요. 그래서 그룹사운드 활동을 하면 거의 머리들을 다 길렀죠. 저도 마찬가지로 길렀는데 경찰한테 걸렸지 뭐예요. 머리 뒤에를 이발기로 밀어놓아서 그게 얼마나 창피했는지(웃음)…. 그때가 박정희 대통령 시절인데 그래도 재미있었어요.” 과거를 회상하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던 장인표 악단장은 핸드폰을 뒤적거리다 무언가를 찾았다는 듯 화면을 들어 내밀었다. 화면 속에는 나이 지긋하신 할아버지들이 앞을 응시하며 밝게 웃는 모습의 사진이 있었는데, 시대를 풍미했던 음악가들이라 그런지 하나같이 멋쟁이인 모습이었다. 한국 대중음악 1세대로 불리는 그들의 얼굴에는 지난 세월 또한 어려 있었다. 장인표 악단장은 코로나로 인한 위험성으로 선후배들을 위한 모임을 준비하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이 커 보였다. 그러고는 사진 속의 인물들을 한 사람씩 호명하며 덧붙였다. “나는 그래요. 음악으로 살아오면서 힘들다고 하지만, 자식들 대학교 다 보내고 음악을 해온 거에 미련이 없어요. 지금도 가끔 만나는 과거 사람들 그러니까 1세대 선후배들과 코로나 때문에 모이지도 못하고 대접도 못해드리는 게 참 아쉬워요. 기존에 선후배들 모임을 150명씩 3년을 해왔거든요. 흘러간 6, 70년대 미8군에 계셨던 분들은 다 여기 계세요. 이 중에 돌아가신 분도 있고 80, 90 넘은 분도 계시고요. 이동기, 최성준, 최용익 1세대 최고의 테너 색소폰 김수열, 피아노 오르간의 박금석 씨, 베이스 최근명 씨, 그리고 이판근 씨라고 아주 유명한 분이죠. 얼른 코로나가 지나가야 되는데….”
    • Special
    2022-10-01
  • [색소폰, 흩어진 기억을 찾아서] 송형섭 연주자가 말하는 그때 그 시절
    한국 6,70년대에 색소폰 소리가 울려 퍼지던 그곳의 풍경은 어땠을까. 그 시절의 사람들은 어떻게 음악을 했고, 어떤 삶을 살았을까. 돌이켜보면 빛바랜 듯 서글픈 그 시절에 대한 감상은 그 시대 젊은이들의 열정이었고, 꿈이었고, 사랑이었기에 가슴 아픈 아름다움으로 남아있다. 전쟁과 해방을 겪으며 시대의 아픔을 노래하고 그로 인해 피어난 미8군에서의 한국 대중가요 전성기는 우리 음악의 뿌리이자 우리 음악의 정체성이기도 하다. 송형섭(69) 색소포니스트는 중학교 밴드부를 시작으로 공군 군악대, MBC 관현악단, iTV 초대 열전 가수왕 악단장과 KBS 위문열차 악단으로 활동했다. 색소폰 앨범을 2집을 발매했다. 색소폰을 시작한 계기 그는 세종시에 위치한 조치원 중학교 1학년, 밴드부에서 클라리넷으로 연주활동을 시작했다. “중학교 음악선생님께서 노래를 불러준 후 계명으로 부를 수 있는 사람은 손 들어보라고 하셨어요. 제가 손을 들어 계명으로 노래를 불렀고, 선생님께서 밴드부 활동을 권했습니다. 저는 초등학교 시절 노래 부르기를 좋아했고, 잘했습니다. 초등학교 졸업식에서 노래를 불렀습니다. 고등학교는 대전에 위치한 보문고등학교를 다녔습니다. 고등학교 브라스밴드부에서 활동했습니다. 당시 조치원 인근에 고등학교가 없어서 대전에 위치한 고등학교를 다녔습니다. 새벽 4시 30분에 일어나서 기차역까지 1시간, 기차타고 1시간 30분 거리를 통학했습니다. 여름에는 음악실에 있는 콘트라베이스 케이스를 이불삼아 그 안에서 잠을 자곤 했습니다. 중, 고등학교 밴드부에서 악단장을 했습니다. 고등학교 3학년 충청남도 대표로 서울에서 개최한 경연대회에 출전해 문교부 장관상을 수상했습니다.” 공군 군악대 입대 “1971년 2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가정형편이 어려워서 4월 6일에 공군 군악대 부사관으로 입대해 5년간 활동했습니다. 훈련소에서 훈련받고 7월 공군본부로 자대배치를 받았습니다. 그 시절 공군본부는 서울 동작구 대방동에 있었습니다. 1971년 8월 23일 공군 노량진 중대사 앞에서 실미도 사건이 발발했습니다. 공군 26명이 사망했고, 군악대 앞 병원에서 장례가 치러졌습니다. 제가 내무반장시절 가수 나훈아가 군악대에 입대했습니다. 1974년 8월 15일 육영수 여사 장례행사와 국군의 날 행사 등 다양한 국가 행사에 참여했습니다. 16인조 악단 “제대 후 연주자로 활동했습니다. 제가 활동했던 1970년대는 서울 강남이 개발되지 않았던 시절로 시청, 명동, 동대문 등에 위치한 카바레에서 KBS 김인혁 악단장과 함께 활동했습니다. 1979년에서 82년까지 서울 중구 무교동에 위치한 〈월드컵〉에서 16인조로 매월 30만원을 받으며 활동했습니다. 색소폰 알토 2명, 바리톤, 테너, 소프라노 각 1명, 트럼펫과 트럼본 각 2명, 드럼, 기타, 베이스, 오르겐, 바이올린, 첼로 각 1명의 연주자와 함께 활동했습니다. 당시 유명했던 김정구 씨가 사회자로 가수 윤복희, 김세레나, 현미와 가수 인순이는 그 시절 백댄서로 활동했습니다. 일본인 관광객들도 많이 방문했습니다. 저녁 12시에 통행금지가 있었습니다. 대부분의 카바레는 오후 6시에 시작해서 10시30분에 영업을 종료했습니다. 연주가 끝나면 급하게 술 한 잔 마시고, 막차를 타고 귀가했습니다.” 대구에서 활동 “당시 활동할 무대는 많은 반면, 연주자는 적었습니다. 특히 지방은 연주자를 구하기 힘들었습니다. 지방은 하숙비를 제외하고 서울에서 받는 급여의 2배 이상을 줬습니다. 서울 월드컵에서 대구 백화점 11층에 위치한 맥심 나이트클럽으로 옮겨, 그룹사운드로 활동했습니다. 하숙비가 8만원인 시절, 80만원을 받으며 활동했습니다. 그 시절 대구 아파트 18평이 600만원이었습니다. 그룹사운드는 직접 노래하며 연주하는 악단으로 기타, 베이스, 오르겐, 가수, 색소폰, 트럼펫 등 6~7인조로 활동했습니다.” 서울랜드 “자녀가 초등학교에 입학할 무렵 대구 활동을 접고 상경했습니다. 1988년 놀이공원 서울랜드가 개장했습니다. 권혁순 선생님께 편곡, R&B 등을 배웠습니다. 권혁순 선생님은 KBS 이봉조 악단에서 총무로 활동했습니다. 방송국이 통폐합되면서 방송국에서 활동하던 악단이 서울랜드 악단에서 활동했습니다. 저도 그 무렵 권혁순 선생님과 함께 서울랜드에서 퍼레이드와 음악분수에서 연주했습니다. 놀이공원은 주로 낮에 활동해 밤무대 연주활동과 병행했습니다. 그렇게 3여년 활동하다 1991년 MBC 관현악단에 입사해서 1998년 IMF로 퇴사했습니다.” MBC 관현악단 입사 “MBC 프로그램 〈우정의 무대〉에서 주로 활동하며 전국에 있는 군부대를 다녔습니다. 백령도는 3번 갔는데, 그 중 한 번은 색소포니스트 김원용과 함께 갔습니다. MBC에서 색소포니스트 김수열, 신동진과 함께 활동했습니다. 방송국 관현악단은 연주자라면 누구나 원하는 일자리로 일주일에 1회에서 2회 연주활동을 해도 급여와 보너스는 물론 자녀 학자금을 지원 받을 수 있었습니다. 주로 낮에 활동해 저녁은 밤무대를 병행할 수 있어서 방송국에 입사하면 퇴사하지 않아서 입사가 어려웠습니다.” 앨범 “퇴사 후 1999년도에 MBC 퇴직금 1천만 원으로 CD와 카세트테이프를 발매했습니다. 김원용 색소포니스트가 운영하는 강남구 신사동에 위치한 예하 녹음실에서 녹음했습니다. MBC 후배 연주자들이 녹음에 참여해줬습니다. 앨범 발매 첫날 천 장씩 판매돼 총 5만장을 판매했습니다. 2집은 크라운 음반사와 계약해서 발매했습니다. 1집은 알토 위주로 연주했고, 2집은 테너 위주로 연주했습니다.” 패티김 세종문화회관 공연 “패티김은 1989년 대중가수로 처음으로 세종문화회관 대강당에서 공연했습니다. 저는 객원 색소폰 연주자로 그 공연에서 연주했습니다.” 세종문화회관은 1978년 ‘순수예술의 발전 육성을 위해 사용한다’는 목적으로 세워져 대중연예 관련 공연을 허락하지 않았다. 세종문화회관 운영자문위원을 맡고 있던 순수예술가들이 공연장의 품위와 관객의 질적 수준 등의 이유로 크게 반발했다. 하지만 패티김은 논란 끝에 무대에 섰고, 팬들의 성원 속에 이틀 동안 진행된 콘서트를 무사히 마쳤다. 그래도 논란은 끝나지 않았고, 세종문화회관 운영자문위원 가운데 두 사람이 사퇴했다. 이 같은 편견의 반발은 오래가지 못했고 문화의 자연스런 흐름 또한 막을 수 없었다. 그 해 10월 16일 이미자가 세종문화회관 최초로 트로트 공연을 펼쳤고 이후 많은 대중가수가 무대에 나섰다. “1990년대 유명 가수의 이름으로 진행되는 디너쇼가 생겼습니다. 저는 패티김, 이미자, 주현미, 김용민, 진성, 인순이, 김세레나 등의 악단에서 활동하며 디너쇼 등에서 활동했습니다.” 라이브 카페 “2000년대에 라이브카페가 많이 생겼습니다. 경기도 시흥에 위치한 〈물왕리 저수지〉, 경기도 의왕시 학의동에 위치한 〈백운호수〉, 경기도 하남시에 위치한 〈미사리〉, 광주에 위치한 〈원천 저수지〉, 대장동 인근 고기동에 위치한 〈고기리 저수지〉 등 저수지 인근에 라이브 카페가 성행했습니다. MBC 퇴사 후 라이브 카페에서 활동했습니다. 주로 낮 시간에 카페에서 30분 연주활동을 했고, 한 카페에서 100만원씩 받았습니다. 8곳에서 10곳까지 연주했습니다. 그 당시 라이브 카페는 혼자 연주하며, 노래했습니다. 차에 반주기, 플롯, 클라리넷, 테너, 소프라노, 알토 색소폰 악기를 실고 다녔습니다. 수원에서 〈열린 음악회〉 라이브 카페를 2006년에 개업해서 2018년까지 직접 운영했습니다. 카페에 그랜드 피아노가 있어서 연주와 노래가 가능했습니다. 라이브 카페를 운영하던 시절, 파독광부(1963년부터 1980년까지 실업문제 해소와 외화획득을 위하여 한국정부에서 7,900여 명을 독일에 파견) 45주년 기념 근로자의 날 행사에 초청받아 가수 채송화, 이수정과 연주자 정해철과 함께 독일에 다녀왔습니다. 덕분에 프랑스 등 다른 지역도 구경했습니다.” 색소폰 연습실 “라이브 카페를 운영하면서 색소폰 연습실을 10여년 운영하다 코로나로 폐업했습니다. 현재 유튜브 활동과 행사 연주를 하며 지냅니다. 유튜브는 코로나가 시작되면서 개설해서 2년 6개월 활동하고 있습니다. 구독자는 27,900명으로 연습실에서 주 1회 녹음해서 곡을 올리고 있습니다. 유튜브 댓글에 다른 연주자의 연주는 2~3곡 들으면 질리는데, 제 음악을 들어도 질리지 않아서 마약 같은 음악이라며, 신청곡을 신청하기도 합니다. 저는 색소폰 연주를 가수가 노래하듯이 감정을 실어서 연주하고자 노력합니다.” 색소폰 매력 “색소폰 매력은 희노애락을 표현할 수 있는 악기로 내 속에 있는 감정을 풀어내듯이 연주할 수 있는 악기입니다. 반주기로 여러 악기는 대체됐지만 색소폰의 간드러지는 감정 표현은 어려워 대체되지 않았습니다. 색소폰은 다양한 장르를 연주할 수 있는 악기입니다. 저는 1965년도에 색소폰을 시작해 카바레, 극장쇼, 그룹사운드, 스탠드바 등에서 활동하면서 다양한 장르를 연주해서 발라드와 트로트 연주는 자신 있습니다. 강남구 수서에 위치한 삼성의료원에서 20여년 매월 봉사연주를 하고 있습니다. 오후 5시에 1층 로비에서 연주하는데, 진료를 기다리거나 보호자로 환자를 기다리면서 관객석에 있는지, 연주를 듣고 싶어서 앉아 있는지 관객의 자세와 눈빛으로 알 수 있습니다. 저는 관객과 호응하면서 연주합니다. 그건 연주자의 몫으로 첫 곡은 준비한 곡으로 연주하고, 현장에서 관객이 원하는 곡으로 즉흥 연주를 합니다. 간혹 연주자가 자신의 연주에 도취돼 관객을 살피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관객의 마음을 움직이는 연주가 관객과 호응하는 연주입니다.” 송형섭 선생님은 몇 년 전 계단에서 구르는 사고로 목을 다쳐 전신마비로 손가락의 감각을 잃었다. 현재 손가락에 감각이 없다. 선생님은 “사고 후 손가락 감각이 없어서 거울을 보며 어떤 음인지 확인하면서 연습해서 지금은 색소폰을 연주할 수 있게 됐다”라며, “유튜브에 880곡을 올렸는데, 1,000곡을 올리는 것이 목표”라고 말씀하셨다. 1,000곡이 아닌 2,000곡이 등록되는 날을 기대해본다.
    • Special
    2022-09-01
  • [Item Inside] 구민상의 마우스피스 맛보기 - Beechler Diamond Inlay M6S
    치킨은 특별한 외식이 아닌 경우, 제일 먼저 떠오르는 메뉴 중 하나다. 치킨에 치즈, 카레, 고추 등 다양한 재료가 가미된 것도 있지만 결국 오래 먹어도 질리지 않는 건 치킨 본연의 맛을 살린 오리지널 프라이드다. 오늘 소개하는 비출러 다이아몬드 인레이 M6S는 귀를 자극하는 강렬함은 적지만 로우 베플 마우스피스가 가져야 하는 오리지널 사운드가 마치 잘 버무려 만든 프라이드치킨이 떠오르는 마우스피스다. 다이아몬드 인레이 마우스피스는 3가지 모델이 있다. [S]모델과 [M] 그리고 [L] 이렇게 3가지다. 각 모델마다 바디 옆면 하단에 오프닝과 함께 흰색 마감으로 작게 모델명을 새겼다. (사진 ➎) [S] 모델은 스몰 보어(Small Bore)와 미디움 하이 베플(Medium High Baffle)의 조합으로 특이하게 말발굽 모양의 챔버로 만들어져 이 중에 제일 밝고 직진성이 좋다. 케니지(Kenny G)는 S5S를 스파이로 자이라(Spyro Gyra) 밴드의 제이 버켄슈타인(Jay Beckenstein)은 S6S 그리고 제럴드 알브라이트(Gerald Albright)는 S10S를 사용한다. 오늘의 주인공이 속해있는 [M] 모델은 미디움 보어(Medium Bore)와 낮은 로우 베플(Low Baffle)로 이전에 넬슨 란젤(Nelson Rangell)이 M7S를 사용했다. (사진 ➏) 마지막으로 [L] 모델은 라지 보어(Large Bore)와 중간 높이의 미디움 베플(Medium Baffle)로 만든다. 이렇게 3가지 모델별로 각각 다른 색채와 성향을 갖는다. 필자는 예전에 제럴드 알브라이트를 좋아했다. 학생 시절 다이아몬드 인레이가 단일 모델로 알고 다른 모델을 구입했다. 구독자분들은 이런 실수를 하지 않길 바라며, 반드시 본인에게 맞는 모델을 잘 선택하길 바랍니다. 오늘의 주인공은 [M] 모델로 오프닝은 6인 마우스피스로 앞서 설명한 것처럼 베플이 거의 없는 로우 베플로 만들어져 눈으로만 보면 메이어 마우스피스와 쌍둥이 같다. (사진 ➐) 그러나 테스트에서 다이아몬드 인레이[M6S]는 다른 음색과 성향을 보여주며 필자의 관심을 끄는 데 성공했다. 마우스피스의 크기나 외형이 다르지 않고, 입으로 느껴지는 앙브슈어(Embouchure)에 전혀 어색함이나 불편함이 없다. 숨을 불어넣으면 호흡으로 전해지는 약간의 저항이 있지만, 이내 풍부한 노멀톤(Normal-Tone)의 소리가 색소폰 바디를 거쳐 답답함 없이 흘러나와 첫 만남에 호감을 높였다. 적당한 볼륨에서 낮은 베플의 하드러버가 만들어 내는 특유의 옹골진 소리와 저음부터 고음까지 균일한 음색을 유지해 연주하는 동안 편안했다. 볼륨을 줄이면 소리가 자연스레 퍼지며 부드러워 거의 서브톤 (Sub-Tone)에 가까운 음색으로 바꿔 마치, 우산 위에 보슬비가 소리 없이 내려앉듯 차분해지며 주변으로 퍼져 나간다. 얻는 것이 있으면 놓치는 것도 있듯, 작은 볼륨에서 퍼지는 부드러움을 얻은 만큼 셀마 마우스피스와 같은 또렷한 명료함은 조금 내려놓아야 한다. 볼륨을 서서히 높여가면, 다이아몬드 인레이가 가진 보슬비처럼 부드러운 소리의 엣지 (Edge) 부분이 소나기로 바뀌어 우산 위에 소리 내며 부딪쳐 이리저리 튕겨 내듯 파형이 점차 거칠게 부서진다. 메이어와 볼륨 크기는 실제 비교할 때 크게 차이나지 않지만, 소리의 직진성은 메이어보다 조금 앞선다. 아마도 다이아몬드 인레이[M6S] 모델이 주는 엣지의 약간 밝고, 열린 성향의 음색이 더해져 직진 성향이 크게 느껴진다. 메이어 마우스피스는 가요나 팝 멜로디를 연주할 때 다른 악기 음색과 잘 녹아들어 멜로디가 선명하지 못해 아쉬웠다. 반면 [M6S]는 볼륨을 높이면, 직진 성향이 커져 메이어보다 멜로디가 입체적으로 튀어나와 불만이었던 부분이 일정 부분 해소된다. 그러나 직진성과 엣지의 밝고 약간 퍼지는 파형은 메이어와 비교한 것으로 같은 가족인 다이아몬드 인레이 [S] 모델에 비하면 일반적인 로우 베플의 담백한 소리에 가깝다. 중음에서 느껴지던 직진성이 가미된 어쿠스틱한 사운드가 팜 키(Palm Key)의 고음 영역까지 연결되어 음색의 일관성과 함께 고음의 날카로움을 줄여주어 편안함을 제공한다. 대신 고음이 가지고 있는 파워는 메이어와 비슷한 정도로 크게 폭발적이지 않다. 강한 텅잉이나 큰 볼륨으로 연주하면 표현은 잘 전달된다. 하지만, 다른 악기의 음색 위에서 맘껏 뛰기보다 다른 악기의 음색과 손잡고 함께 뛰는 느낌이다. 파워가 없지 않지만 강렬한 어택(Attack)에서 로우 베플의 한계가 분명히 느껴진다. 하지만 이 파워 문제는 6호라는 오프닝이라는 한계도 있어서 더 큰 오프닝의 마우스피스나 리드의 브랜드에 따라 볼륨과 어택이 변화될 수 있다. 비출러는 메탈과 하드러버 마우스피스 모두 반에서 한 치수 가깝게 낮게 표기된다. 다이아몬드 인레이 6호는 메이어 7호와 거의 비슷하다. 중저음에서 볼륨만 줄여도 라텍스 침대처럼 부드럽고 푹신하게 가라앉는 음색이다. 서브톤의 활용이 타 마우스피스에 비해 많지 않지만 좀 더 깊은 서브톤의 연주가 편하고, 음색은 듣는 이의 귓가를 바람처럼 가볍게 스치고 지나간다. 하지만 볼륨을 줄이면, 음색은 이미 서브톤과 흡사한 공기 소리를 많이 머금어서 굳이 서브톤 효과를 줄 필요가 없다. 알토 색소폰에서 서브톤을 최대치로 연주할 일은 드물다. 다이아몬드 인레이 [M6S] 모델은 타 마우스피스와 비교해 서브톤에 대한 의존도가 낮고, 서브톤 테크닉 사용에 아주 최적화된 마우스피스는 아니지만, 평균 이상의 벨런스를 가졌다. 이제 고음에서 더 높이 올라가는 “가 포지션”(알티시모 – Altissimo) 사용에 대해 알아보자. 로우 베플 마우스피스는 “알티시모”에서 상대적으로 하이 베플 마우스피스에 비해 힘차게 뻗어나가는 직진성과 파워가 부족하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다. [M6S]도 한 음씩 눌러가며 강하게 어필하면 어색하다. 강한 어조 대신 부드럽게 다뤄가며 만드는 음은 사뿐사뿐“가 포지션”의 영역을 돌아다니며 서로 손 잡고 쉽게 멜로디를 만든다. 로우 베플 마우스피스로 만드는 고음역의 특성을 이해하고 조절한다면 [M6S]는 더 높은 음역도 편하게 노래하듯 가볍게 움직여 준다. 외형은 일반적인 알토 하드러버 마우스피스와 비슷해 평범하지만, 색소폰 마우스피스에 관심 있는 연주자는 입술 앞에 살짝 보이는 흰색의 바이트 플레이트나 혹은 연주 중간 악기에 꽂혀 있는 마우스피스의 흰색 마름모 모양만 보아도 바로 비출러 다이아몬드 인레이를 알 수 있다. 혹은 모르는 이들도 흰색의 마름모가 기억에 남을 만큼 단순하지만 강렬한 디자인적인 요소다. [M6S]의 음색은 얼핏 들으면 디자인만큼이나 평범할 수 있지만 연주해보면, 로우 베플 마우스피스에게 원하는 어쿠스틱한 음색과 아주 조금의 직진성 그리고 시원함을 적당히 가지고 있어 연주 가능한 장르의 확장이 용이하다. 디자인만큼 음색이 기억에 남는 다. 다이아몬드 인레이 [M6S] 마우스피스의 비싸지 않고 평범한 가격 또한 함께 누리는 즐거움이다. * 지난 7월호 본문 37페이지에 16M 으로 표기된 이름을 18M으로 정정합니다. (월간색소폰)구민상 색소포니스트= sax01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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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8-01
  • [색소폰, 흩어진 기억을 찾아서] 신동진 현역 연주자가 말하는 그때 그 시절
    한국 6,70년대에 색소폰 소리가 울려 퍼지던 그곳의 풍경은 어땠을까. 그 시절의 사람들은 어떻게 음악을 했고, 어떤 삶을 살았을까. 돌이켜보면 빛바랜 듯 서글픈 그 시절에 대한 감상은 그 시대 젊은이들의 열정이었고, 꿈이었고, 사랑이었기에 가슴 아픈 아름다움으로 남아있다. 전쟁과 해방을 겪으며 시대의 아픔을 노래하고 그로 인해 피어난 미8군에서의 한국 대중가요 전성기는 우리 음악의 뿌리이자 우리 음악의 정체성이기도 하다. 신동진(71)은 재즈 1세대 색소포니스트로 올해 그의 아들 재즈 3세대 색소포니스트 신명섭과 한 무대에 올랐다. 재즈계 '색소폰 부자'로 통하는 아버지와 아들 사이다. 첫 악기, 클라리넷 “저는 중학교 밴드부에서 1학년에 클라리넷으로 악기를 배웠습니다. 그 당시 오디오가 없던 시절로 주로 라디오로 음악을 들었습니다. 색소폰은 고등학교 2학년 무렵, 졸업 후 사회 연주자로 활동하기 위해서 익혔습니다. 플루트는 관심 있어서 고등학교 때 익혔습니다. 밴드부에서 활동하면, 다양한 리드 악기를 연주할 기회가 많습니다. 악기는 작은 악기부터 배우면 큰 악기를 쉽게 익힐 수 있지만, 큰 악기부터 배우면 작은 악기를 배우기 어렵습니다. 클라리넷은 소리를 내기 위해서는 구멍 하나하나를 막아야 합니다. 색소폰은 클라리넷보다 악기가 커서 운지가 수월했습니다.” 재즈 1세대 재즈 1세대 연주자들은 1950년 한국전쟁 뒤 주한미군 부대에서 활동하며 배웠다. 재즈음악을 대부분 독학으로 터득했다. 재즈는 나이트클럽에서 춤추기 위한 음악, 이른바 '백뮤직'으로 연주자들은 재즈를 연주해야 활동할 수 있었다. 전통 재즈를 연주할 곳은 마땅치 않았다. 어쩌다 클럽에서 연주하면, 손님들 취향과 다르다는 이유로 하루 만에 잘리기 일쑤였다. 그 어려웠던 시절을 극복하고 '야누스'라는 이름으로 한국 땅에 재즈음악을 널리 전파한 사람들이 바로 1세대다. 원년 멤버 몇은 이미 세상을 떠났고, 나머지 멤버와 후배들이 그 자리를 채우고 있다. 야누스 원년 멤버 신동진은 대표적인 재즈 1세대로 재즈클럽 '야누스'의 원년 멤버로 다양한 곳에서 연주활동을 했다. ‘야누스’는 한국 재즈의 산실이 된 클럽으로 박성연이 1978년 서울 신촌 시장골목 2층에서 문 열었다. 박성연은 재즈 보컬리스트로 2천여 장의 LP 원판이 있었다. LP음반이 귀했던 시절로 LP원판을 들을 수 있는 곳은 거의 없었다. “저는 그룹사운드로 활동하면서 이판근 선생님께 사사 받고 있었습니다. 선생님께서 야누스 활동을 권유하셔서 1981년도에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그 당시 이판근 선생님은 야누스 베이스 연주자이자 지휘자였습니다. 재즈는 국내에서 마니아의 장르로 재즈를 매일 연주하는 곳이 없었습니다. ‘야누스’에서 첫 해 한 달에 1번 저녁에 공연했습니다. 야누스를 찾는 고객은 재즈 팬으로 재즈를 듣고 싶어서 찾아왔고, 입소문으로 찾는 고객도 점점 늘었습니다. 매장은 넓지 않았습니다. 공연하는 날은 매장에 낚시 의자를 넣었고, 점차 공연 횟수가 많아지면서 앉을 자리가 없었습니다. 관객들은 공연이 있는 날은 2층에 매장이 있는데, 1층에서 2층으로 오르는 계단에 서서 연주를 들었습니다. 야누스는 손님의 인원과 상관없이 최선을 다해서 연주했습니다. 1시간 공연을 3회로 할 정도로 많은 분들이 찾았습니다. 밴드가 오랜 시간 활동하니 연주자가 교체되면서 유지됐습니다. 색소폰 김수열, 정성조, 이동기, 드럼 조상국, 피아노 신관웅, 클라리넷 이동기, 트럼펫 강대관 등과 같이 활동했습니다.” 디바야누스 “‘야누스’는 신촌에서 대학로로 옮겨서 10여년 운영했습니다. 잠깐 이대 후문에서 운영하다 청담동으로 옮겨서 10여년 운영했습니다. 박성연 씨는 서울 교대역 인근에서 재즈카페를 운영하다 돌아가셨습니다.” 현재 서울 교대역 인근에서 ‘디바야누스’로 ‘야누스’의 전통을 이어받아 재즈 보컬리스트 말로가 운영하고 있다. 신동진 밴드 신동진 밴드로 기타 방병조, 트럼펫 최선배 외 여러 명과 나이트클럽에서 재즈와 여러 장르를 연주했다. “1990년대는 MBC 관현악단에서 활동하면서 카튼클럽 전속연주자로 10여년 활동했습니다. 카튼클럽은 서울 강남역 인근에 있는 1157㎡(약 350평) 규모의 나이트클럽입니다. 주 고객은 중년 이상 상류층으로 편하게 들을 수 있는 재즈곡을 선호했습니다. 일본 관광객은 한국에 1980년대 초에서 90년대 초반까지 많이 방문했습니다. 일본은 재즈를 모르면, 막노동꾼이라고 부를 정도로 재즈를 즐겼습니다. 바쁜 연주생활 속에 이판근 선생님께 10여년 재즈를 배웠습니다. 방송국 악단 활동이 끝나면, 개인 밴드가 있어서 밤무대 활동도 병행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연주생활과 개인연습으로 하루에 3시간 이상 잔적이 없었습니다.” 자신과의 싸움 “재즈는 자신과의 싸움입니다. 재즈연주자는 대중이 즐겨듣는 음악이 아니라 금전적으로 어렵습니다. 저는 다양한 활동을 하면서 재즈에 관심 있어서 시작했습니다. 야누스의 월 1회 공연을 위해 한 달에 2번 자비로 모여서 연습했습니다. 재즈 연주자는 즉흥연주를 합니다. 일정한 틀 안에서 자신의 감성을 표현하는 것이죠. 그래서 이론을 배우고, 많은 연습이 필요한 장르입니다. 배움은 끝이 없어서 하늘 볼 시간 없이 연주하고 연습했습니다.” 신동진 선생님은 1991년 예술의 전당에서 재즈 공연을 한다. 개인연습실 신동진 선생님은 개인 연습을 위해 연습실을 30여년 운영하고 있다. “색소폰은 같은 곡을 연주해도 연주자마다 다른 소리가 납니다. 소리를 터득하는데, 오랜 시간이 필요합니다. 저는 연주활동 후 주로 새벽에 귀가했습니다. 방음시설이 갖춰져서 새벽에 연습할 수 있는 개인연습실이 필요했습니다. 지금은 원하는 자료와 정보를 쉽게 구할 수 있지만, 제가 활동하던 시절은 음악을 듣기도 어렵고, 악보도 귀해서 공부할 자료가 많지 않았습니다. 다양한 자료를 연주자들과 공유하고 싶어서 연습실에 진열했습니다.” 신동진 선생님의 연습실에서 1981년도 공연 포스터와 다양한 자료를 볼 수 있었다. 신동진 선생님은 “올해 그의 아들 신명섭과 오케스트라에서 합동 공연을 했다”라며, “앞으로도 아들과 꾸준한 연주활동을 이어가고 싶다”고 말했다. 한편, 신명섭은 버클리 음대를 졸업하고. 뉴욕에서 연주활동을 했다. 현재 2집 발매를 위해 곡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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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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